2010년 밴쿠버 동계올림픽, 빙판 위에서 한 편의 완벽한 드라마가 펼쳐졌다.
김연아가 세계 최고 점수를 기록하며 금메달을 목에 건 순간,
피겨 스케이팅은 새로운 기준을 맞이했다.
그녀의 연기는 단순한 스포츠 경기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예술성과 기술이 완벽하게 결합된 무대,
표정과 동작 하나까지 음악과 일체화된 표현력,
그리고 단 한 번의 실수도 없는 기술적 완성도.
김연아는 그 모든 것을 갖춘 ‘완벽한 선수’였다.
그 결과, 전 세계 피겨 팬과 심판들의 눈에는 김연아가 ‘기준’이자 ‘교과서’로 남게 되었다.
그러나 모든 전성기에는 끝이 오듯,
김연아의 은퇴 이후 피겨 무대는 급격히 변화하기 시작했다.
채점 시스템 개편으로 기술 점수 비중이 크게 늘어나면서,
여자 싱글 종목에서도 쿼드 점프(4회전 점프)와 트리플 악셀 같은
고난도 기술이 필수 요소가 되었다.
예술성보다는 기술 난도가 우선시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고,
메달 경쟁 구도 역시 러시아와 일본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김연아가 지배하던 시대는 ‘클래식 피겨의 황금기’라 불린다.
균형 잡힌 프로그램, 세밀한 음악 해석,
무결점 기술이 한 무대 안에서 구현되던 시기였다.
그러나 그 이후 피겨는
체력과 기술 한계에 도전하는 새로운 양상으로 발전했다.
점프 횟수와 난이도를 극대화하는 전략이 우세해졌으며,
예술성은 때때로 뒷전으로 밀리기도 했다.
물론 이를 단순한 퇴보라 할 수는 없다.
변화된 채점 체계 속에서 선수들은
생존과 승리를 위해 다른 길을 선택한 것이고,
그 과정에서 기술적 경계는 더 넓어졌다.
이 글에서는 김연아 이후 피겨 계보가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러시아의 기술 혁명, 일본의 균형 전략,
한국 피겨의 도전이라는 세 가지 흐름으로 나누어 살펴본다.
단순히 선수 명단이 바뀐 것이 아니라,
시대를 지배하는 철학과 스타일이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이해하는 데 초점을 맞출 것이다.

러시아의 ‘기술 제국’ 시대 – 쿼드 점프의 표준화
김연아가 은퇴 무대를 치른 2014년 소치 이후,
피겨 스케이팅의 흐름은 조금씩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김연아가 지배하던 시기에는
‘클린한 기술’과 ‘음악과의 조화’가 경기의 핵심 기준이었다면,
그 이후에는 점수 체계의 변화와 함께 기술 점수 비중이 점점 더 커졌다.
이 변화의 흐름을 가장 빠르고 강하게 받아들인 나라가 바로 러시아였다.
러시아는 오랫동안 피겨 강국이었지만,
여자 싱글에서 김연아와 아사다 마오가 세계 무대를 이끌던 시기에는
금메달을 차지하지 못했다.
그러나 은퇴 이후 공백기를 틈타,
러시아는 주니어 시스템을 대대적으로 개편했다.
체계적인 체력 훈련, 과학적 점프 분석,
그리고 어린 선수들의 빠른 기술 습득을 위한 강도 높은 훈련을 결합한 것이다.
이러한 전략은 단 몇 년 만에 세계 피겨 지형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러시아 부흥의 핵심 인물은 에테리 투트베리제 코치였다.
그는 선수들에게 4회전 점프와 트리플 악셀을 필수로 장착시키고,
프로그램 후반부에 점프를 몰아넣어 가산점을 극대화하는 전략을 사용했다.
2018 평창 올림픽에서 알리나 자기토바가 이 전략으로 금메달을 차지하며
‘후반 점프 전략’은 러시아식 훈련의 상징이 되었다.
이어 안나 셰르바코바, 알렉산드라 트루소바, 카밀라 발리예바 등
‘쿼드 시스터즈’가 등장하면서,
여자 피겨의 기술 난도는 전례 없이 높아졌다.
이 방식은 성과 면에서는 압도적이었지만, 부작용도 컸다.
어린 나이에 극한의 체중 관리와 고강도 훈련을 반복하며 쿼드를 익히다 보니
부상 위험이 높고, 선수 생명이 짧았다.
일부 선수들은 18세 이전에 은퇴를 선언하기도 했다.
또한 예술성과 음악 해석이 상대적으로 약해,
기술만 강조된 ‘점프 경기’라는 비판도 있었다.
그럼에도 러시아의 기술 혁명은 피겨 판도를 바꾸었고,
이제 쿼드 점프 없이 세계 정상에 오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시대가 되었다.
일본의 ‘균형형’ 피겨 – 기술과 예술의 조화
러시아가 기술 중심의 ‘단기 폭발력’으로 세계 무대를 장악했다면,
일본은 다른 길을 택했다.
일본은 김연아와 하뉴 유즈루가 보여준 예술성과 표현력의 힘을 믿었다.
러시아식 훈련 시스템이 빠른 시일 내에 성과를 내는 반면,
선수 생명을 단축시키는 부작용이 있다는 점을 간파한 일본은
장기적인 커리어 설계에 더 무게를 두었다.
남자 피겨에서 하뉴 유즈루의 성공은 일본 피겨 철학의 결정판이었다.
그는 기술 점수와 예술 점수를 모두 높은 수준에서 유지하며,
팬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는 무대가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했다.
특히 2014 소치와 2018 평창에서 연속 금메달을 차지하며
일본 피겨의 상징이 되었다.
하뉴의 영향은 일본 주니어 선수 전반에 퍼져,
‘단순한 점프 성공보다 완성도 있는 연기’라는 기준을 세웠다.
여자 피겨에서도 일본은 안정성과 표현력을 중시했다.
사토 미하라, 카오리 사카모토 같은 선수들은
쿼드 점프보다는 트리플 악셀과 안정적인 트리플 콤비네이션을 기반으로
프로그램 전체의 완성도를 높였다.
특히 사카모토는 강력한 스케이팅 파워와 음악 해석 능력을 바탕으로,
러시아 선수들의 공백 속에서도 베이징 올림픽 금메달을 거머쥐었다.
일본의 강점은 장기적인 커리어 유지다.
부상 위험을 줄이는 훈련법과 체계적인 기술·표현력 병행 훈련은
선수들이 20대 중반까지도 정상급 기량을 유지하게 했다.
또한 일본 관객들은 점프 성공 여부보다
무대의 감동과 완성도를 중시하는 문화가 있어,
선수들이 자연스럽게 예술성을 발전시키는 데 집중할 수 있었다.
이 덕분에 일본은 ‘기술과 예술의 균형’이라는 전통을 지키며
러시아와 차별화된 피겨 계보를 이어가고 있다.
한국 피겨의 변화 – 김연아 그림자에서 벗어나기
한국 피겨는 김연아의 은퇴 이후 오랫동안
‘제2의 김연아’를 찾는 여정에 있었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한 명의 스타를 발굴하는 문제를 넘어,
국가 전체의 피겨 경쟁력을 어떻게 끌어올릴 것인가라는 과제를 안고 있었다.
러시아와 일본이 각각 다른 전략으로 세계를 장악하는 동안,
한국은 인프라와 지원 체계에서 여전히 제한이 많았다.
김연아가 보여준 예술성과 깨끗한 연기는 여전히 한국 선수들의 강점이었지만,
점수 체계에서 기술 점수의 비중이 높아진 만큼,
쿼드 점프나 트리플 악셀 같은 고난도 기술의 필요성이 절실했다.
이 때문에 유영, 임은수, 박소연 등 차세대 선수들은
어린 시절부터 기술 훈련을 강화해야 했다.
하지만 선수층이 얇고 훈련 환경이 제한적이라는 현실은
여전히 해결해야 할 문제로 남았다.
그럼에도 희망적인 변화가 있었다.
유영은 2020년 4대륙 선수권에서 은메달을 차지하며
국제 무대 경쟁력을 입증했고,
주니어 무대에서도 쿼드 점프를 시도하는 선수들이 점차 늘고 있다.
대한빙상경기연맹과 김연아 재단의 협력으로
장기적인 육성 시스템이 강화되는 것도 긍정적인 흐름이다.
또한 김연아의 예술성은 여전히 한국 피겨의 자산이다.
세계 대회에서 기술 난도가 다소 부족하더라도,
감정 전달과 음악 해석에서 높은 점수를 받는 경우가 많다.
앞으로 한국 피겨가 세계 정상 무대에 다시 오르기 위해서는
러시아식 기술 혁신과 일본식 커리어 관리,
그리고 김연아식 예술성을 결합한
새로운 스타일을 완성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렇게 된다면 ‘김연아 이후의 시대’를 넘어,
또 다른 황금기를 맞이할 가능성이 충분하다.
김연아 이후의 피겨 계보는 단순한 세대교체를 넘어 ‘철학의 변환기’였다.
김연아가 남긴 시대는
기술·예술·감정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이상형 피겨’였지만,
그 이후 세계 무대는 기술 난도의 경쟁으로 급격히 기울었다.
러시아는 쿼드 점프를 표준화하며 기술력을 극한으로 끌어올렸고,
일본은 기술과 예술의 균형을 유지하며 장기적인 성공 모델을 구축했다.
한국은 김연아의 유산을 이어받아 예술성에서는 강점을 보이면서도,
기술 경쟁력 강화를 위해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있다.
앞으로 피겨 스케이팅은 다시 한 번 중요한 선택의 순간을 맞게 될 것이다.
기술 점수와 예술성 중 어느 쪽에 더 무게를 둘 것인가,
그리고 팬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무대는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찾아야 한다.
분명한 것은, 빙판 위에서 오래 기억되는 연기는
단순히 높은 점수로만 완성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김연아가 남긴 교훈처럼,
완벽한 기술과 진심 어린 표현이 만나는 순간, 그 무대는 역사에 남는다.
그리고 언젠가 또 다른 ‘김연아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