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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다의 전설: 브레스 오브 더 와일드, 침묵하는 서사

by 궁금해봄이6 2025. 8. 13.

 

2017년, 닌텐도의 대표 프랜차이즈이자 게임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걸작,

‘젤다의 전설: 브레스 오브 더 와일드

(The Legend of Zelda: Breath of the Wild, 이하 BOTW)’가 세상에 나왔다.

 

이 작품은 단순히 오픈월드 게임의 한 장르를 완성했다는 평가를 넘어서,

서사를 전달하는 방식에서도 깊은 혁신을 보여주었다.

기존의 게임 서사가 주로 대사, 컷신, 미션 브리핑을 통해 전달되었다면,

BOTW는 절제된 대사와 방대한 침묵을 통해

플레이어로 하여금 스스로 이야기를 완성하게 만든다.

이 ‘침묵하는 서사’는 단순한 미니멀리즘이 아니라,

플레이어 경험의 주도권을 철저히 플레이어에게 돌려주는 구조다.

BOTW의 주인공인 링크(Link)는 전작들처럼 말 한마디 하지 않는다.

게임 속 대화에서 그는 고개를 끄덕이거나,

짧게 몸짓을 취하는 정도로만 의사를 표현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플레이어는

이 ‘무언가를 말하지 않는’ 주인공과 깊은 감정적 교감을 느낀다.

그 이유는 게임이 서사의 빈자리를

세계 탐험과 플레이어의 상상력으로 채우게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잔디 위로 부는 바람, 멀리 보이는 산맥의 곡선, 비 오는 날 불어오는 차가운 공기,

그리고 폐허 속에서 들려오는 작은 발자국 소리—

이 모든 것이 말보다 더 강한 서사를 전달한다.

BOTW의 세계는 거대한 퍼즐처럼 구성되어 있다. 

하이랄 전역에 흩어진 유적, 무너진 마을, 

불타버린 들판은 과거의 사건을 직접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플레이어가 시각적 단서와 환경의 분위기를 통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유추하게 한다. 

이는 플레이어가 단순히 게임을 ‘따라가는’ 소비자가 아니라, 

서사를 ‘창조하는’ 공동 작가가 되게 만든다.

이 글에서는 BOTW가 어떻게 ‘침묵하는 서사’를 구축했는지, 

그리고 그것이 왜 다른 게임들과 구분되는 특별한 체험을 선사하는지 

세 가지 측면에서 분석한다. 

첫째, 환경이 말하는 이야기를 통해 플레이어가 감정을 느끼게 하는 방법. 

둘째, 플레이어 주도형 기억 복원을 통한 스토리 전달 방식. 

셋째, 절제된 대사와 캐릭터 표현이 만들어내는 몰입감이다. 

BOTW의 침묵은 단순한 공백이 아니라, 

플레이어의 마음속에서 이야기가 피어나는 비옥한 토양이었다.

젤다의 전설: 브레스 오브 더 와일드, 침묵하는 서사
젤다의 전설: 브레스 오브 더 와일드, 침묵하는 서사



 

 


환경이 말하는 이야기: 대사 없이 전해지는 감정


BOTW의 가장 인상적인 점 중 하나는 환경이 곧 서사라는 점이다. 

예를 들어, 게임 속 ‘하이랄 성’ 주변에 가면, 

거대한 폐허와 불타버린 건물들이 플레이어를 맞이한다. 

NPC가 굳이 ‘여기서 큰 전투가 있었다’고 말하지 않아도, 

플레이어는 시각적 증거를 통해 그 사실을 직감한다. 

벽돌 사이에 낀 화살촉, 무너진 다리 아래 갇혀 있는 파괴된 마차, 

그리고 여전히 들려오는 ‘가논’의 불길한 기운은 

과거의 참혹함을 생생하게 전한다.

이러한 환경 서사는 하이랄 곳곳에서 발견된다. 

예를 들어 ‘마을터’처럼 이름만 남아 있는 장소들은 

주인의 부재를 통해 비극을 말한다. 

빈 집 안에 남아 있는 깨진 그릇, 덩굴이 집안을 뒤덮은 풍경은 

단 몇 초 만에 플레이어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이때 느껴지는 감정은 슬픔뿐만 아니라, 

‘이곳에서 어떤 사람들이 살았을까?’라는 호기심까지 포함한다.

BOTW의 환경 설계는 의도적으로 ‘완전한 정보’를 주지 않는다. 

완벽한 지도나 사건 설명 대신, 

파편화된 흔적을 배치해두어 플레이어 스스로 퍼즐을 맞추게 만든다. 

이는 마치 고고학자가 발굴 현장에서 

유물 조각을 보고 전체 모양을 상상하는 과정과 닮아 있다. 

이렇게 환경은 대사 없이도 강력한 감정적 울림을 주며, 

플레이어를 ‘이야기의 목격자’에서 ‘이야기의 재구성자’로 바꾼다.

그리고 이 과정은 단순한 ‘배경 감상’이 아니라, 

플레이어의 정서적 몰입을 촉발하는 장치로 작동한다. 

산꼭대기에서 내려다보이는 폐허의 풍경은 전투의 상처를 한눈에 보여주고, 

길가의 버려진 무기와 방패는 누군가가 끝까지 싸우다 쓰러졌음을 암시한다. 

플레이어는 그 흔적을 보며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을까?”라는 질문을 품게 되고, 

그 질문이 탐험을 이어가는 원동력이 된다. 

이렇게 BOTW의 환경은 말 한마디 없이도 이야기를 전달하는, 

침묵 속의 강력한 해설자다.

 

 

 


플레이어 주도형 기억 복원: 조각난 이야기의 재결합


BOTW의 서사는 ‘메인 퀘스트를 따라가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이야기의 핵심은 플레이어가 흩어진 기억을 모아가는 과정에 있다. 

‘추억 회상’ 시스템이 그 대표적인 예다. 

하이랄 전역에 흩어진 특정 장소를 찾아가면, 

링크의 잃어버린 기억 한 조각이 영상으로 재생된다. 

그러나 이 기억들은 시간 순서대로 주어지지 않는다. 

어떤 기억은 마지막 결전 직전의 긴박한 장면일 수 있고, 

또 다른 기억은 평화로운 피크닉 장면일 수 있다.

이 비선형적 구조는 플레이어의 해석에 따라 서사의 무게 중심이 달라지게 만든다. 

먼저 ‘결전 직전의 장면’을 본 플레이어는 게임 내내 긴장감을 유지할 수 있다. 

반대로 ‘링크와 젤다가 평온하게 대화하는 장면’을 먼저 본 플레이어는, 

두 인물의 관계성에 더 주목하게 된다. 

이런 방식은 동일한 게임이라도 각자의 기억 조합에 따라 전혀 다른 감정 곡선을 만들어낸다.

이 기억 수집 과정에서 플레이어는 ‘수동적 수용자’가 아니라 ‘적극적 탐험가’가 된다. 

하이랄 전역을 여행하며 장소를 찾는 과정은 곧, 

스스로 서사의 순서를 정하는 행위가 된다. 

게임이 강제하는 ‘정답 스토리’가 없기에, 

플레이어는 자신만의 순서와 해석으로 이야기를 완성한다. 

이는 BOTW의 서사가 ‘침묵’ 속에서 플레이어의 경험으로 채워지는 이유 중 하나다.

더 나아가, 이 시스템은 플레이어의 감정 몰입을 장기적으로 유지하는 장치가 된다. 

기억의 조각을 찾는 것은 단순한 수집형 퀘스트가 아니라, 

서사의 빈틈을 메우는 행위이자 플레이어의 해석 욕구를 자극하는 퍼즐이다. 

기억을 모으는 순서에 따라 ‘젤다’라는 캐릭터에 대한 인상, 

가논과의 싸움에 대한 동기, 그리고 하이랄이라는 세계관의 무게감이 달라진다. 

어떤 플레이어는 먼저 비극적인 장면을 접해 세계의 절망을 깊이 느끼고, 

또 다른 플레이어는 밝은 장면을 통해 희망을 먼저 경험한다. 

이처럼 BOTW의 비선형 기억 복원은 

모든 플레이어가 각자의 젤다 전설을 만들도록 설계된, 

침묵 속의 맞춤형 서사 구조다.

 

 

 


절제된 대사와 캐릭터 표현: 상상력을 위한 빈자리


BOTW에서 링크는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무표정한 캐릭터’가 아니다. 

표정의 미묘한 변화, 몸짓, 시선의 방향, 

그리고 카메라 연출이 그의 감정을 전달한다. 

예를 들어, 한 NPC가 슬픈 사연을 전할 때, 

링크는 살짝 고개를 숙이고, 시선을 피한다. 

이 짧은 연출만으로도 ‘그의 마음이 무겁다’는 것을 알 수 있다.

NPC들의 대사 역시 절제되어 있다. 

과거 젤다 시리즈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장황한 설명 대신, 

BOTW의 NPC들은 종종 핵심만 말하고 대화를 끝낸다. 

이는 플레이어로 하여금 ‘그 뒤에 숨은 사연’을 스스로 상상하게 만든다. 

예를 들어, 한 마을 주민이 

“가논이 오기 전, 우리는 모두 행복했어요”라고만 말하고 대화를 마친다면, 

그 ‘행복했던 시간’이 어떤 모습이었는지는 플레이어의 상상력 속에서 구체화된다.

이러한 절제는 몰입도를 극대화한다. 

대사가 적기 때문에 플레이어는 더 주의 깊게 환경과 표정을 관찰하게 된다. 

그리고 이 관찰 과정에서 플레이어는 서사의 ‘공동 창작자’가 된다. 

말하지 않는 것이 곧 ‘빈자리’를 만드는 것이고, 

그 빈자리를 채우는 것은 오롯이 플레이어의 몫이다. 

BOTW의 침묵은 무심함이 아니라, 

오히려 ‘당신이 이 세계의 이야기를 완성하라’는 초대장이다.

‘젤다의 전설: 브레스 오브 더 와일드’의 침묵하는 서사는, 

단순히 대사를 줄이거나 컷신을 최소화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게임이라는 매체가 지닌 상호작용성과 플레이어의 상상력을 결합해, 

말보다 더 깊은 울림을 주는 새로운 서사 방식이었다. 

BOTW는 말하지 않음으로써 더 많은 것을 전했고, 

설명하지 않음으로써 더 강하게 느끼게 했다.

이 게임에서 플레이어는 단순한 관객이 아니다. 

하이랄의 바람, 폐허의 그림자, 기억의 파편, 

그리고 NPC의 짧은 한 마디 속에서 플레이어는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같은 게임이라도 누군가는 ‘비극의 세계에서 희망을 찾는 이야기’를, 

또 누군가는 ‘잃어버린 관계를 복원하는 여정’을 경험한다. 

BOTW의 침묵은 이런 다양성을 가능하게 했다.

침묵하는 서사는 게임을 끝낸 뒤에도 오래 남는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 후, 

플레이어는 여전히 하이랄의 어딘가에서 불어오는 바람소리를 기억한다. 

그리고 그 바람 속에는, 

누구도 말하지 않았지만 분명히 존재했던 수많은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BOTW는 그 이야기들을 강요하지 않는다. 

대신 플레이어의 마음속에 심어두고, 시간이 흐를수록 천천히 피어나게 만든다. 

이것이 바로 BOTW가 ‘침묵’으로 전한 가장 큰 목소리이자, 

우리가 오래도록 기억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