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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아버지도 덕수였다 — 국제시장으로 보는 우리 아버지 세대의 진짜 이야기

by 궁금해봄이6 2026. 4. 3.


2014년 겨울, 영화 한 편이 대한민국을 조용히 울렸다.

화려한 특수효과도, 자극적인 서사도 아니었다.

그저 한 남자의 일생이었다.

부산 국제시장 한 귀퉁이에서 평생을 버텨낸 한 남자,

윤덕수의 이야기.

영화 〈국제시장〉은 개봉 이후 1,400만 명이 넘는 관객을 끌어모으며

한국 영화 역대 흥행 상위권에 이름을 올렸다.

숫자보다 더 의미 있는 건,

영화관을 나오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핸드폰을 꺼내 부모님께 전화를 걸었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아무 말 없이, 그냥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나는 이 영화가 단순한 신파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눈물을 유도하는 장치들이 곳곳에 있다.

하지만 그 눈물의 근원을 들여다보면,

그것은 감동이 아니라 미안함이다.

그리고 미안함의 뿌리에는 오래도록 이해하지 못했던 아버지라는 존재,

혹은 그 세대 전체에 대한 뒤늦은 공감이 자리하고 있다.

우리는 그들이 왜 그렇게 살았는지 물어본 적이 없다.

어쩌면 물어볼 언어를 갖지 못했다.

〈국제시장〉은 그 언어를 대신 만들어준 영화다.


이 글은 영화 〈국제시장〉을 매개로,

우리 아버지 세대가 살아온 삶의 방식을 다시 들여다보려는 시도다.

그들이 무엇을 포기했고,

어떤 방식으로 사랑을 표현했으며,

왜 우리는 그것을 그토록 늦게 알아챘는지.

그 질문들을 붙들고,

이제라도 늦지 않은 감사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당신의 아버지도 덕수였다 — 국제시장으로 보는 우리 아버지 세대의 진짜 이야기
당신의 아버지도 덕수였다 — 국제시장으로 보는 우리 아버지 세대의 진짜 이야기

 

꿈을 포기하는 것이 어른이 되는 일이었던 시대

영화의 첫 장면,

어린 덕수는 흥남 부두에서 가족의 손을 놓친다.

아버지를 잃고, 막내 동생도 잃을 뻔하다.

그 혼란 속에서 아버지는 피난선에 오르지 못한 채 소리친다.

"덕수야, 네가 이 집의 가장이다. 동생들 잘 부탁한다.

" 그 한 마디가 덕수의 인생을 결정한다.

아홉 살짜리 아이가, 그 순간 꿈을 가질 권리를 잃는다.


이후 덕수의 삶은 일관된 하나의 방향을 향한다.

가족을 먹여 살리는 것.

그는 독일 광산으로 간다.

위험하고 고된 일이지만 돈이 되기 때문이다.

베트남으로 간다.

총알이 날아다니는 전장 근처지만 외화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꽃분이네 가게를 지킨다.

팔고 싶어도, 아버지가 돌아올 자리를 남겨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덕수는 한 번도 "나는 무엇을 하고 싶다"고 말하지 않는다.

아니, 말할 수가 없다.

그에게 허락된 질문은 오직 하나였다.

"가족을 위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이것이 그 세대의 공통된 문법이었다.

 

1950년대에서 1980년대를 관통하며

한국의 아버지들은 '나'라는 주어를 지웠다.

개인의 욕망은 사치였고,

자기 계발은 여유 있는 자들의 이야기였다.

그들은 고등학교를 포기하고 공장에 다녔다.

대학에 합격하고도 입학을 미뤘다.

하고 싶은 일이 있어도 되는 일을 했다.

그것이 당시의 어른됨이었다.

자신을 지우는 것, 그게 책임을 다하는 방식이었다.
우리 세대는 이것을 종종 오해한다.

자기표현을 억압한 세대, 감정에 둔한 세대, 권위적인 세대라고.

하지만 그 무감함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실은 감정을 느낄 여백 자체가 없었던 삶이 있다.

매일 생존의 문제를 다루는 사람이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란 쉽지 않다.

 

덕수가 눈물을 참는 건 강해서가 아니다.

울면 무너질 것 같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무너질 수가 없었다.
우리가 아버지 세대를 이해하는 첫 번째 열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들이 꿈을 말하지 않은 건, 꿈이 없어서가 아니라는 것.

그들이 자신에 대해 말하지 않은 건,

자아가 없어서가 아니라는 것.

다만 그 꿈과 자아를 묻어두고 앞으로 걸어가는 것이,

그 시대가 그들에게 요구한 삶의 방식이었다는 것.

〈국제시장〉은 그 묻힌 것들을 천천히 파내어 우리 눈앞에 펼쳐놓는다.

 

 

사랑한다는 말 대신, 그들이 선택한 방식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는

덕수가 아내 영자에게 청혼하는 장면이 아니라,

그 이후의 삶 전체다.

덕수는 자주 아내와 다툰다.

다정한 말을 잘 하지 못한다.

아이들에게 "사랑한다"고 쉽게 표현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매일 새벽 가게 문을 열고, 밤늦게 닫는다.

가족이 아플 때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자존심을 꺾는다.

자식이 유학을 가겠다고 하면, 반대하면서도 결국 돈을 만들어준다.
이것이 그 세대의 사랑법이었다.

언어가 아닌 행동으로,

감정이 아닌 헌신으로 표현되는 사랑.

우리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인식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우리가 배운 사랑의 언어는 달랐기 때문이다.

"사랑해"라는 말, 안아주는 것,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

우리는 그것들을 사랑의 기준으로 삼았고,

아버지는 그 기준에서 늘 부족해 보였다.


하지만 생각해보라.

세 아이를 키우기 위해 이국 땅 탄광에서 먼지를 마시며 일했던 그 시간이

사랑이 아니고 무엇인가.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시장을 돌고,

저녁 열 시가 넘어서야 집에 들어오면서도

단 한 번도 가족을 버리지 않은 것이 사랑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들의 사랑은 말로 오지 않았다.

등으로 왔고, 손으로 왔고, 참음으로 왔다.


사회심리학에서는 사랑의 표현 방식이

문화와 세대에 따라 크게 다르다고 말한다.

영미권 문화에서 익숙한 언어적 애정 표현은

한국의 1950~70년대 문화권에서는 오히려 낯선 것이었다.

그 시대 부모들이 내면화한 사랑의 형태는 '돌봄'과 '희생'이었다.

자식이 배불리 먹는 것,

학교에 보내는 것,

아프지 않게 하는 것.

그것이 사랑의 완성이었다.


〈국제시장〉이 우리를 울린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이 번역의 순간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영화는 덕수의 행동들을 사랑이라는 언어로 번역해준다.

우리가 읽지 못했던 아버지의 언어를,

영화가 대신 읽어주는 것이다.

영화관에서 그 번역을 받아들인 순간,

많은 이들이 처음으로 아버지의 삶이 보였다고 했다.

그리고 그 봄이, 너무 늦었다는 후회를 동반했다.
사랑한다는 말 한 마디를 들었다면 달랐을까, 라는 질문은

어쩌면 잘못된 방향을 향하고 있다.

더 나은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는 아버지의 언어를 배우려 한 적이 있었는가.

우리는 그 무뚝뚝함 뒤에 무엇이 있는지 궁금해한 적이 있었는가.

그 세대를 향한 감사가 뒤늦어진 것은,

그들이 사랑을 표현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우리가 그 표현을 읽는 법을 몰랐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가 누리는 오늘은 누군가의 포기 위에 서 있다

영화의 후반부,

나이 든 덕수는 홀로 꽃분이네 가게에 앉아 아버지의 사진을 바라보며 말한다.

"아버지, 내 이래 살았는데, 이래도 됩니까.

나 정말 힘들었거든요."

이 장면에서 관객 대부분이 무너진다.

평생 힘들다고 말하지 못한 사람이,

이미 세상을 떠난 아버지에게 처음으로 털어놓는 장면.

뒤늦은 고백. 늦어버린 위로.


이 장면이 우리를 건드리는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덕수에 대한 연민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 자신의 죄책감이다.

덕수에게 우리는 자식의 자리에 있다.

그가 힘들었다는 걸 알면서도, 혹은 모르면서도,

우리는 그 위에서 자라났다.

우리의 교육이, 우리의 기회가, 우리가 당연하게 누린 많은 것들이

누군가의 포기와 인내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사실.

그것이 한꺼번에 밀려온다.


경제학자들은 한국의 급격한 경제 성장을 설명할 때

'압축 성장'이라는 단어를 쓴다.

서구가 200년에 걸쳐 이룬 것을 한국은 불과 40~50년 만에 해냈다.

하지만 그 압축의 비용은 어디서 왔는가.

그것은 숫자가 아닌 사람에게서 왔다.

독일 광산으로 간 노동자들,

베트남으로 간 기술자들,

중동 사막에서 일한 건설 노동자들,

새벽부터 밤까지 공장을 돌린 여공들,

그리고 가족을 위해 자신의 시간을 모두 바친 수많은 덕수들.

그들의 노동과 희생이 지금 우리가 딛고 선 이 땅의 토대다.


우리 세대는 종종 부모 세대의 한계를 비판한다.

권위주의적이라고, 감정 표현이 부족하다고, 변화에 느리다고.

그 비판이 완전히 틀린 건 아니다.

하지만 그 비판은

우리가 얼마나 다른 조건에서 자랐는지를 잊을 때 위험해진다.

우리는 굶지 않았다.

학교에 다녔다.

꿈을 꿀 수 있었다.

직업을 선택할 수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할 수 있었다.

이 당연해 보이는 것들이 당연하지 않았던 시대가 불과 한 세대 전이다.


〈국제시장〉이 역사적 고증이나 정치적 입장보다

더 중요하게 다루는 것은 바로 이 질문이다.

당신은 지금의 당신이 어떻게 가능해졌는지 아는가.

그 질문 앞에서 우리는 잠시 멈추게 된다.

나의 오늘은 누군가의 어제 위에 있다.

그 어제를 살아낸 사람들에게,

우리는 아직 제대로 감사를 전한 적이 있는가.
감사는 이해에서 온다.

그리고 이해는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는 데서 시작한다.

〈국제시장〉은 그 들여다봄의 창을 열어준 영화다.

덕수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비로소

아버지 세대가 어떤 시간을 통과해왔는지를 감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것은 머리로 아는 역사가 아니라,

가슴으로 느끼는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