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릴 것인가, 죽일 것인가.”
‘언더테일(Undertale)’은
단순한 인디 게임의 외형 속에 인간의 본성을 시험하는 윤리적 거울을 숨겨두었다.
이 게임은 총, 칼, 스킬보다 ‘선택’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세상이다.
당신이 공격 버튼을 누를 때마다,
누군가의 감정이 흔들리고 세계의 방향이 바뀐다.
즉, 언더테일은 싸움이 아니라 ‘감정의 철학 실험’이다.
2015년,
토비 폭스(Toby Fox)가 거의 혼자 개발한 이 작품은 인디계의 신화가 되었다.
픽셀 그래픽과 단순한 조작에도 불구하고,
수백만 명이 이 게임에 감정적으로 몰입했다.
그 이유는 명확하다.
언더테일은 “게임은 결국 폭력을 위한 장르인가?”라는 질문을
정면으로 던지기 때문이다.
플레이어가 ‘살인 루트’를 택하든,
‘비폭력 루트’를 고르든,
그 선택의 무게는 철저히 감정으로 되돌아온다.
이 게임의 대사들은 놀라울 만큼 철학적이다.
몬스터와 인간,
피해자와 가해자,
선택과 책임의 경계가 무너진다.
언더테일은 말한다. “넌 진짜로 착한 사람인가?”
그리고 묻는다. “네가 한 선택은 정말로 너의 의지였는가?”
이 글에서는
언더테일의 ‘선택의 구조’,
‘윤리적 실험’,
‘감정의 철학’이라는 세 가지 축을 중심으로
이 게임이 어떻게 감정과 도덕을 연결하는 예술로 진화했는지를 살펴본다.
언더테일은 단지 게임이 아니라,
플레이어의 감정을 도덕의 거울로 비추는 실험실이다.

선택의 구조 – ‘루트’가 아닌 ‘의지’의 서사
언더테일의 가장 큰 특징은
플레이어의 선택이 직접 세계를 창조한다는 점이다.
이 게임에는 크게 세 가지 루트가 존재한다.
‘Pacifist(평화 루트)’,
‘Neutral(중립 루트)’,
‘Genocide(학살 루트)’다.
이 루트들은 단순히 분기점이 아니다.
플레이어의 선택이 게임의 존재 이유를 바꾼다.
처음 게임을 시작하면,
당신은 지하세계의 작은 인간 아이로 깨어난다.
괴물들은 처음엔 적대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싸움 대신 ‘행동(Act)’을 선택하면,
대화, 칭찬, 농담, 용서 같은 감정적 선택지가 열린다.
이때부터 언더테일은 전통적인 RPG의 공식을 무너뜨린다.
공격 대신 ‘공감’을 누를 수 있고,
폭력 대신 ‘유머’를 선택할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언더테일은 플레이어의 ‘선한 의도’조차도 실험한다는 것이다.
‘모두를 살리면 착한 플레이어’라는 단순한 도식은 통하지 않는다.
플레이어가 ‘착한 루트’를 선택하더라도,
그 안에는 자신의 죄책감을 덜기 위한 자기만족이 섞여 있다.
즉, 언더테일은 도덕적 행동의 ‘동기’를 묻는다.
착하게 행동하는 이유가 진심인가,
아니면 구원을 얻기 위한 계산인가?
또한 이 게임은 ‘리셋’이라는 행위 자체도 철학적 장치로 사용한다.
플레이어가 세이브 파일을 지우고 다시 시작하더라도,
게임은 당신의 과거를 기억한다.
심지어 이전에 학살 루트를 택했다면,
평화 루트에서도 캐릭터들이 어딘가 불안한 눈빛으로 당신을 바라본다.
그 순간, 언더테일은 플레이어에게 ‘윤리적 시간의 무게’를 느끼게 한다.
행동은 되돌릴 수 없고, 기억은 삭제되지 않는다.
이러한 구조는 단순히 스토리의 분기가 아니라,
플레이어의 자유의지에 대한 철학적 논쟁을 제시한다.
당신은 정말로 자유롭게 선택했는가,
아니면 ‘착한 결말을 봐야 한다’는 게임적 습관에 이끌린 것인가?
언더테일은 ‘플레이어의 자율성’을 해체하면서,
게임이 곧 인간의 내면 심리를 탐구할 수 있음을 증명했다.
윤리의 실험 – ‘살인 루트’가 던지는 냉혹한 질문
많은 게이머들이 ‘학살 루트(Genocide Route)’를 한 번쯤은 시도한다.
단순한 호기심 때문이다.
하지만 언더테일은 그 선택을 잔혹할 만큼 정교하게 설계했다.
당신이 한 번의 공격으로 몬스터를 쓰러뜨릴 때마다,
게임의 배경음악은 점점 불협화음으로 변하고,
캐릭터의 표정은 미묘하게 사라진다.
심지어 마을의 분위기조차 ‘생명 없는 공허’로 변한다.
특히 ‘산즈(Sans)’와의 전투는 언더테일의 도덕 실험이 절정에 달하는 지점이다.
그는 단순한 적이 아니라,
당신의 죄를 알고 있는 ‘심판자’다.
산즈는 끊임없이 이렇게 말한다.
“넌 지금, 재미로 사람을 죽이고 있잖아.”
그 대사는 플레이어의 가슴을 찌른다.
학살 루트는 단순한 ‘배드엔딩’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무의미한 폭력’을 선택할 때
어떤 감정이 남는지를 보여주는 실험이다.
결국 모든 것을 죽인 플레이어는 승리자가 아니다.
그는 텅 빈 화면 앞에서 허무와 자책감만을 마주한다.
이때 언더테일은 놀라운 방식으로 감정의 윤리를 실현한다.
플레이어의 죄책감이 곧 ‘도덕적 체험’으로 기능하는 것이다.
더 무서운 점은,
이 게임이 플레이어에게 도덕적 판결을 내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언더테일은 “너는 나쁘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저 당신이 선택한 결과를 보여줄 뿐이다.
그 결과 속에서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끼게 만든다.
즉, 이 게임은 도덕을 강요하지 않고,
‘감정의 자각’을 통해 윤리를 학습시킨다.
언더테일의 학살 루트는 인간의 폭력성보다 ‘무감각’을 더 두려워한다.
플레이어가 죽이는 행위를 반복하면서도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윤리의 붕괴이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언더테일은 단순한 게임을 넘어,
‘디지털 시대의 감정 철학서’가 된다.
감정의 철학 – ‘공감’이라는 게임의 언어
언더테일의 진짜 혁신은 감정을 언어로 만든 게임 시스템이다.
플레이어는 ‘전투’ 대신 ‘행동’을 통해 상대의 마음을 움직인다.
이 구조는 게임의 본질을 ‘공감’으로 재정의한다.
싸워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이해해서 살아남는 것이다.
대표적인 장면은 ‘토리엘(Toriel)’과의 첫 만남이다.
그녀는 주인공을 보호하려 하지만,
플레이어가 공격 버튼을 누르면 눈빛이 변한다.
그 순간, 언더테일은 ‘행동의 감정적 결과’를 체험시킨다.
살짝의 실수, 혹은 무심한 클릭 하나가 관계를 무너뜨릴 수 있다는 사실을
플레이어는 뼈저리게 느낀다.
이러한 감정의 흐름은
게임의 음악과 텍스트 디자인에도 녹아 있다.
토비 폭스의 음악은 감정의 파동을 정밀하게 계산한다.
평화 루트의 ‘Heartache’나 ‘Undertale’ 테마는
단순한 배경음이 아니라 ‘감정의 대사’다.
이 음악이 흐르는 순간, 플레이어는 ‘감정의 책임’을 체험한다.
또한 언더테일은 인간과 몬스터의 경계를 허문다.
몬스터들은 사실 인간보다 더 인간적이다.
그들은 두려워하고, 사랑하고, 용서한다.
이 설정은 ‘타자에 대한 공감’을 상징한다.
플레이어는 결국 깨닫는다.
진짜 괴물은 몬스터가 아니라,
무감각하게 버튼을 누르는 ‘나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이렇듯 언더테일은 감정과 윤리를 동일선상에 놓는다.
이 게임은 말한다.
“감정 없는 도덕은 공허하다.”
결국 도덕적 인간이란, 올바르게 생각하는 자가 아니라
타인의 감정에 반응할 줄 아는 자라는 사실을 일깨운다.
이것이 바로 언더테일이 던지는 궁극의 메시지다.
윤리란 논리가 아니라 ‘감정의 공명’에서 태어난다.
언더테일은 게임이라는 매체의 한계를 뛰어넘은 감정 실험이다.
이 작품은 인간의 본성, 자유의지, 윤리의 책임을
감정이라는 언어로 번역해냈다.
플레이어의 선택은 데이터로 저장되지만,
그 여운은 마음속에서 오래도록 남는다.
결국 언더테일은 묻는다.
“당신은 왜 싸우는가?”
그리고 또 묻는다.
“당신의 착함은 진심인가, 아니면 계산된 선택인가?”
이 질문은 단순히 게임 속 이야기만이 아니라,
현실의 인간관계와 사회에도 그대로 투영된다.
우리가 누군가를 판단하고, 용서하고, 외면하는 모든 순간
우리는 언더테일의 플레이어가 된다.
언더테일은 말없이 교훈을 남긴다.
폭력보다 공감이 더 큰 힘을 가진다고.
용서가 때로는 가장 용감한 선택이라고.
그리고 무엇보다,
감정을 잃은 인간은 결국 스스로를 잃는다고.
이 게임은 끝났지만, 그 질문은 여전히 남는다.
‘진정한 착함’이란 무엇인가.
‘윤리’는 누가 판단할 수 있는가.
‘감정의 철학’으로서의 언더테일은
플레이어가 다시 현실로 돌아왔을 때 비로소 완성된다.
그것이 바로 언더테일이 인디 명작을 넘어
하나의 ‘철학적 경험’으로 기억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