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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을 죽이지 않았는데 왜 죄책감이 들까?

by 궁금해봄이6 2025. 11. 9.

 

게임 ‘언더테일(Undertale)’은 단순히 픽셀 그래픽의 인디 게임으로 보이지만,
그 안에는 놀랍도록 철학적인 감정 구조가 숨겨져 있다.
많은 RPG가 적을 쓰러뜨리고 경험치를 쌓는 전통적인 성장 서사를 따르지만,
언더테일은 그 ‘공식’을 뒤집는다.
이 게임에서 플레이어는 적을 죽일 수도, 살려둘 수도 있다.
그 선택 하나하나가 이야기의 방향을 완전히 바꾼다.

 

언더테일의 세계는 ‘지하 세계(Underground)’라 불리는 괴물들의 공간이다.
플레이어는 우연히 그곳에 떨어진 인간 아이 ‘프리스크(Frisk)’로서
괴물들과 마주하고, 대화하고, 때로는 싸우며 길을 찾아 나간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게임은 끊임없이 묻는다.
“당신은 왜 싸우는가?”
“살려주는 것은 진짜 선한가?”

플레이어의 선택은 단순한 결과를 넘어 감정적 책임으로 이어진다.


‘선택’은 게임의 기계적 행위가 아니라,
감정적 도덕 판단의 시험대가 된다.
언더테일은 이를 통해 윤리의 개념을 감정의 층위로 끌어올린다.
즉, 선과 악의 경계를 논리로가 아니라 감정으로 경험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언더테일이 어떻게 감정과 윤리를 연결하는지,
그리고 ‘선택’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어떤 철학적 메시지를 전달하는지를 살펴본다.
이 게임은 결국 “플레이어의 마음속에서 무엇이 변하는가”를 이야기한다.

괴물을 죽이지 않았는데 왜 죄책감이 들까?
괴물을 죽이지 않았는데 왜 죄책감이 들까?

 

선택의 무게 — 행위의 결과가 감정으로 돌아올 때

언더테일의 이야기는 서사적으로 단순하지만,
그 안의 선택 구조는 인간의 내면을 세밀하게 자극한다.
서론에서 언급한 “왜 싸우는가”라는 질문은
이제 “그 싸움의 결과는 누구의 마음에 남는가”라는 물음으로 바뀐다.

게임의 매 순간은 선택의 연속이고,
그 선택은 눈에 보이지 않는 감정의 흔적을 남긴다.

 

언더테일의 세계에는 세 가지 루트가 있다.
‘페시피스트(Pacifist)’,

‘뉴트럴(Neutral)’,

그리고 ‘제노사이드(Genocide)’ 루트.
이 세 가지는 단순히 결말의 차이를 보여주는 분기가 아니다.
그것은 플레이어가 스스로의 도덕 감각과 감정 반응을
‘체험’을 통해 검증하도록 설계된 구조다.

초반의 작은 선택 하나가 나비효과처럼
세계의 분위기를 완전히 바꾸는 순간,
플레이어는 자신이 이 세계의 ‘창조자’이자 ‘파괴자’임을 동시에 자각한다.


특히 ‘페시피스트 루트’에서 모든 괴물을 용서하고 친구가 되는 과정은
그저 따뜻한 이야기로 끝나지 않는다.
용서의 감정이 쌓이는 동시에,
‘만약 그때 싸웠다면?’이라는 윤리적 긴장이 마음속에 남는다.
즉, 언더테일은 ‘옳은 행동’을 강요하지 않는다.
대신 ‘그 행동이 남긴 감정’을 느끼게 만든다.

 

반대로 ‘제노사이드 루트’에서는
플레이어가 선택적으로 냉혹해질 수 있는 여지를 남긴다.
모든 괴물을 죽이고,

경험치를 쌓으며,
점점 더 강해지는 자신을 바라보는 그 쾌감 뒤에는
서서히 스며드는 죄책감이 있다.
게임은 이 감정을 단순히 대사로 표현하지 않는다.
캐릭터의 표정, 음악의 톤, 그리고 세계의 공기가 바뀐다.
그 모든 변화가 플레이어에게 감정의 피드백으로 돌아온다.

 

결국 언더테일의 ‘선택’은
논리적 결과가 아니라 감정적 응보의 형태로 플레이어를 찾아온다.
그 감정은 세이브 파일을 지워도 남고,
리셋을 눌러도 지워지지 않는다.
데이터가 아니라 ‘기억’ 속에 남는 게임.
그것이 언더테일의 가장 잔인하면서도 아름다운 부분이다.

그리고 이 모든 감정적 체험은 다음 단계,
즉 감정이 윤리를 이끄는 구조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왜냐하면 플레이어가 느낀 죄책감, 연민, 슬픔은
이제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행동의 윤리적 근거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감정의 철학 — 윤리보다 앞서는 공감의 설계

언더테일은 도덕 교과서처럼 ‘이것이 옳다’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이 행동을 했을 때 당신의 마음은 어떻게 느끼는가’를 묻는다.
즉, 감정이 윤리보다 먼저 작동하도록 설계된 것이다.
본론 1에서 살펴본 선택의 경험은

이제 감정의 기반 위에서 재해석된다.
그 감정은 단순히 이야기의 장식이 아니라,
윤리적 사유의 출발점이 된다.

 

언더테일의 창작자 토비 폭스(Toby Fox)는
감정의 흐름이 서사의 중심이 되도록
모든 요소를 세밀하게 조율했다.
픽셀 그래픽임에도 불구하고
각 캐릭터의 표정, 대사, 행동 하나하나가
인간적인 온기를 품고 있다.
플레이어는 그 온기를 느끼며
‘괴물’이라는 존재를 더 이상 괴물로 보지 못하게 된다.
그것은 단순한 공감이 아니라,
정체성의 경계를 허무는 감정적 전환이다.

 

예를 들어, 토리엘(Toriel)은
플레이어가 처음 마주하는 보스이지만,
그녀의 대사는 어머니의 품처럼 따뜻하다.
그녀를 공격하는 순간,
플레이어는 ‘이건 게임일 뿐이야’라고 합리화하면서도
묘한 죄책감을 느낀다.
그 감정이 바로 윤리의 첫 단계다.
이때 윤리는 머리로 계산되는 것이 아니라
가슴에서 반응하는 것이다.

 

또한 파피루스(Papyrus)는 순수하고 유머러스하다.
그를 쓰러뜨릴 때 느끼는 공허함은
플레이어가 처음으로 ‘전투의 의미’를 재고하게 만든다.
그 순간, 언더테일은 ‘전투’라는 시스템 자체를
감정적 언어로 변환시킨다.
싸움은 더 이상 승패의 문제가 아니라
감정의 교류이자 상처의 공유가 된다.

 

음악 또한 윤리적 감정의 매개체로 작용한다.
‘MEGALOVANIA’는 단순한 전투 테마가 아니다.
그것은 죄책감과 고통,

그리고 책임의 무게를 상징하는 음악이다.

반면 ‘His Theme’은 용서와 구원의 정서를 상징한다.
플레이어는 음악을 통해 스스로의 선택을 다시 체험한다.
감정이 윤리를 이끌고, 윤리가 감정을 되돌린다.

언더테일이 우리에게 던지는 핵심 메시지는 분명하다.
“도덕은 감정에서 비롯된다.”
이 단순한 문장이 게임의 모든 장면을 관통한다.


결국 우리는 옳고 그름을 이성으로 판단한다고 믿지만,
그 판단의 뿌리는 언제나 감정에 있다.
언더테일은 바로 그 ‘감정의 철학’을 눈앞에 시각화한 작품이다.

 

 

인간성과 선택 — 플레이어는 신이 아닌 인간이다

언더테일의 궁극적 메시지는 ‘플레이어는 신이 아니다’라는 인식이다.
많은 게임은 플레이어에게 전지적 권한을 부여한다.
리셋, 세이브, 로드 — 이 모든 것은 신의 권력처럼 작동한다.
하지만 언더테일은 이 권력을 죄의식으로 되돌려준다.

제노사이드 루트에서는 플레이어가 모든 괴물을 학살하게 된다.
그때 ‘산즈(Sans)’는 말한다.
“너는 그냥 즐기고 있잖아. 이유도 없이.”
이 대사는 플레이어의 내면을 직격한다.
게임 속 선택이지만,
그 선택을 내린 것은 결국 ‘나’라는 인간이다.

 

언더테일은 신적 통제력을 쥔 플레이어를
감정적으로 ‘인간의 위치’로 되돌린다.
이 과정은 마치 니체가 말한 ‘신의 죽음’의 역설처럼 작동한다.
신이 사라졌을 때 인간은 절대적 기준을 잃지만,
그 대신 ‘책임’이라는 무게를 얻는다.
언더테일 역시 그렇게 작동한다.
플레이어가 세계를 조종할 수 있지만,
그 결과에 대한 감정적 책임 또한 피할 수 없다.

따라서 언더테일의 선택 구조는
플레이어에게 단순한 자유가 아닌 자유의 윤리를 요구한다.
무엇을 할 수 있느냐보다,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스스로 묻도록 만든다.
그것이 언더테일이 ‘게임’이 아닌 ‘체험 철학’으로 불리는 이유다.

 

언더테일은 플레이어에게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를 묻지만,
더 깊게 들어가면 “그 선택을 한 당신은 누구인가”를 묻는다.
결국 이 게임은 인간의 윤리적 정체성을 탐구하는 철학적 실험이다.

우리는 종종 게임 속에서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언더테일은 그 자유를 감정의 거울 속에 비춘다.
그 거울 속에서 플레이어는 자신의 선의, 욕망, 죄책감, 그리고 연민을 본다.


이 게임은 승리도 패배도 아닌 ‘성찰’을 남긴다.

언더테일은 전투의 게임이 아니라 감정의 게임이다.
그 안에서 인간은 수많은 선택을 반복하지만,
결국 변화하는 것은 세계가 아니라 ‘플레이어 자신’이다.
그 깨달음이 언더테일이 10년이 지나도 여전히 회자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