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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은 약점일까, 힘일까 — 『Hollow Knight』가 전하는 감정의 진화

by 궁금해봄이6 2025. 9. 15.

 

플레이어가 처음 『Hollow Knight』의 세계에 발을 디디는 순간
가장 먼저 맞닥뜨리는 것은 무겁도록 고요한 침묵이다.
화려한 연출도, 장황한 설명도 없이
작디작은 곤충 같은 주인공은 검처럼 생긴 바늘 하나를 들고
끝없이 침잠한 지하 세계로 내려간다.

이 게임은 흔히 '메트로배니아' 장르로 분류된다.
탐험과 성장, 전투가 중심이 되는 장르지만
『Hollow Knight』는 그중에서도 유난히 정서적 감수성이 두드러진다.
지하 세계 ‘할로우 네스트’는 무너진 왕국의 폐허로
한때 번성했으나 지금은 텅 빈 공간과 메아리뿐인 장소다.
곳곳에 남겨진 파편 같은 문장과 적막한 음악,
그리고 거의 말을 하지 않는 주인공은
플레이어에게 강렬한 고독감을 불러일으킨다.

이 고독은 단순히 분위기의 장치가 아니다.
플레이어는 게임을 진행하며 수없이 죽고
지도 없는 공간을 방황하며 길을 찾고
단서를 조합해 세계의 비밀을 스스로 밝혀내야 한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상황에서
자신만의 의미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바로 『Hollow Knight』의 핵심 감정 설계다.

이 글에서는,
『Hollow Knight』가 어떻게 고독을 설계하고
그 고독을 통해 플레이어의 성장 감정을 이끌어내는지 살펴본다.
그리고 그 감정적 여정이
왜 많은 이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는지
심리적, 서사적, 미학적 측면에서 분석해 보고자 한다.

고독은 약점일까, 힘일까 — 『Hollow Knight』가 전하는 감정의 진화
고독은 약점일까, 힘일까 — 『Hollow Knight』가 전하는 감정의 진화

 


감정 설계의 시작, ‘비어 있음’에서 오는 몰입

 

『Hollow Knight』의 가장 독특한 감정 장치는 의도적인 결핍이다.
플레이어는 게임 초반에 거의 아무런 정보를 받지 못한다.
지도조차 없고, 등장인물들은 두루뭉술한 말을 하며
세계의 질서와 목적을 명확히 알려주지 않는다.

이 결핍은 불친절함이 아니라, 몰입의 통로다.
아무도 알려주지 않기에
플레이어는 스스로 탐험하고 가설을 세우며
세계의 조각들을 수집하는 데 감정적 에너지를 쏟는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세계에 대한 애착과 몰입이 생긴다.

또한, 공간 설계 역시 고독을 강조한다.
광활하면서도 단조로운 색채, 울림만 남은 음향,
드물게 등장하는 NPC들은 플레이어가 오히려
더 외롭다고 느끼게 만드는 장치로 작동한다.
사람은 공백을 채우려는 본능이 있기 때문에
결핍된 세계에 감정을 투사하고,
주인공의 침묵에 스스로의 감정을 이입하게 된다.

여기에 더해 『Hollow Knight』는
탐험 자체를 감정적 사건으로 만든다.
지도 없이 움직이며 처음 가보는 지역에 발을 들일 때
플레이어는 불안과 기대가 교차하는 감각을 경험한다.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 길을 스스로 개척한다는 사실은
처음에는 막막하지만,
곧,  ‘내가 이 세계를 열고 있다’는 주체적 몰입감을 만든다.
이 몰입감은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서,
세계에 자신의 존재를 남기고 싶다는 욕망으로 진화한다.

즉, 『Hollow Knight』의 세계는
플레이어에게 “이야기되지 않은 이야기”를 상상하게 만들며
그 상상이 곧 감정적 소속감을 만들어낸다.
이 점이 많은 다른 액션 게임과 구별되는 핵심이다.

이러한 결핍 기반 설계는
고독이 단순한 부정적 감정이 아니라,
자기 세계를 구축하게 만드는 긍정적 동력으로 기능함을 보여준다.
결핍을 경험할수록 플레이어는
자신의 존재를 세계 속에 각인시키기 위해 움직인다.
그리고 그 과정이 곧 성장이다.

 

 


실패의 누적이 만들어내는 내적 성숙

 

『Hollow Knight』의 전투는 결코 친절하지 않다.
적들은 빠르고 강하며, 보스전은 패턴 파악 없이
힘으로 밀어붙일 수 없다.
게다가 죽으면 소지한 자원이 사라지고
죽은 지점까지 돌아가야만 회수할 수 있다.

이 시스템은 플레이어에게
실패를 전제로 한 학습 곡선을 강요한다.
즉각적인 보상보다는
반복된 패배와 도전을 통해 기술을 습득하게 만든다.
이런 구조는 처음에는 좌절을,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내적 성장감을 선사한다.

실패의 반복은 고독감을 더욱 증폭시킨다.
패배했을 때 도와줄 동료도,
격려하는 연출도 거의 없다.
플레이어는 침묵 속에서 스스로를 추스르고
다시 한 번 전투에 나선다.
그때 느껴지는 감정은 단순한 ‘게임의 어려움’이 아니라
자신을 견디는 힘이 생겨나는 과정이다.

특히 흥미로운 점은,
이 실패가 단순히 ‘장애물’로 그치지 않고
플레이어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장치로 기능한다는 것이다.
같은 보스에게 수십 번 패배하다가 마침내 승리하는 순간
플레이어는 단순히 기술적 숙련을 넘어
자신의 인내와 의지를 증명받은 듯한 감정을 얻는다.
이 감정은 누군가의 칭찬이나 보상 없이도
충만한 자존감으로 이어진다.

이때의 감정 구조는 현실의 성장 경험과도 닮았다.
현실에서의 성장은
대부분 누군가가 정답을 알려줘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수많은 시행착오와 외로움, 자기 의심을 거치며
조금씩 나아갈 뿐이다.
『Hollow Knight』는 바로 그 **‘외로운 성장의 리듬’**을
정교하게 모사한다.

특히 게임 후반부에 가까워질수록
플레이어는 눈에 띄게 실력이 향상되고,
처음엔 넘기 어려웠던 구간들을 가볍게 통과한다.
이 성취감은 외부의 보상이 아니라
자신이 변했다는 내적 확신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이 확신이야말로
고독 속 성장을 감정적으로 완성시키는 결정적 순간이다.

 

 


침묵의 서사가 주는 자기 해석의 자유

 

앞서 살펴본 것처럼,
『Hollow Knight』는 정보의 결핍과 실패의 반복을 통해
플레이어를 고독에 익숙해지게 만들고,
그 과정에서 자율적 몰입과 성장을 유도한다.
이 흐름은 서사 구조에서도 이어지며,
이 게임만의 독특한 감정적 깊이를 완성한다.

『Hollow Knight』의 서사는
기존 게임과 달리 거의 설명되지 않는다.
플레이어는 세계 곳곳에 남겨진 파편적 단서를
스스로 조합해 이야기의 전모를 추측해야 한다.
이 침묵의 서사는 고독한 세계관과 어우러져
매우 독특한 감정 경험을 만들어낸다.

플레이어마다 해석이 달라지고
그 해석이 곧 자신의 여정이 된다.
즉, 『Hollow Knight』는
플레이어가 주인공이자 해설자가 되게끔 설계되어 있다.
이는 단순한 선택형 스토리와는 다르다.
명확한 대사가 없기에,
플레이어는 캐릭터들의 행동과 배경,
적막한 분위기에서 정서를 추출해 내야 한다.

특히 이 과정은 앞서 겪었던 실패의 기억과 맞물리며
플레이어의 감정을 한층 더 진지하게 만든다.
단순한 정보 수집이 아니라
‘내가 왜 이 싸움을 계속하는가’라는 존재적 질문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는 단순한 줄거리 파악이 아닌
자신의 경험을 해석하는 과정이 된다.
결국 이야기를 알아간다는 것은
이 세계에서 자신이 어떤 의미를 가진 존재인가를
스스로 규정하는 행위로 확장된다.

이 과정은 감정적으로도 고립된 상태를 강화한다.
‘정답’이 없는 세계에서
자신만의 의미를 만들어가는 경험은
때로 불안하지만 동시에 해방감을 준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해석으로 세계를 완성하기 때문이다.

이 자유는 곧 정체성의 확립으로 이어진다.
플레이어는 ‘나는 왜 싸우는가’
‘무너진 세계에서 무엇을 지키려 하는가’라는 질문을
자연스럽게 스스로에게 던지게 된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정해져 있지 않지만
고독 속에서 자신만의 서사를 쌓아가는 행위 자체가
감정적 성장으로 이어진다.

결국 『Hollow Knight』는
이야기를 주입하지 않고
플레이어가 고독 속에서 자기 의미를 창조하도록 자극한다.
이것이 침묵의 서사가 지닌 강력한 힘이다.

『Hollow Knight』는 겉보기엔
작은 곤충 캐릭터가 나오는 2D 액션 게임이지만
그 본질은 고독이라는 감정적 토양 위에서 이루어지는 성장 서사다.
정보가 결핍된 세계, 

반복되는 실패, 

침묵의 서사는
모두 플레이어를 외롭게 만들지만
동시에 그 외로움 덕분에만 가능한 몰입과 성숙을 이끌어낸다.

현실에서도 우리는
누군가 곁에 있어주지 않는 순간에
비로소 스스로를 직면하게 된다.
고독은 두려움을 주지만
동시에 가장 강력한 자기 변화의 계기가 된다.
『Hollow Knight』는 바로 그 점을 감정적으로 설계해
플레이어가 자신의 힘으로 세계에 흔적을 남겼다고 느끼게 한다.

이 게임을 마친 뒤 많은 플레이어들이
이유 모를 뭉클함이나 허무함,
그리고 묘한 성취감을 느끼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들은 단순히 한 게임을 클리어한 것이 아니라
고독을 견디며 성장한 자신을 체험했기 때문이다.

결국 『Hollow Knight』는 말한다.
고독은 결핍이 아니라 가능성이고,
약점이 아니라 성장의 근육이다.
누구도 도와주지 않는 그 침묵 속에서
우리는 오히려 가장 멀리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