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초학력 미달, 교실 속 조용한 위기
“국어 지문을 읽긴 했는데, 무슨 말인지 몰라요.”
중학교 2학년인 지후(가명)는
시험 문제를 해설해주는 선생님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글자는 읽지만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
교육부가 정한 ‘기초학력 미달’ 기준에 정확히 해당되는 모습이다.
최근 교육부와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발표한
국가수준 학업성취도 평가 결과에 따르면,
국어, 수학, 영어 주요 과목 모두에서
기초학력 미달 비율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특히 중학교와 일반고등학교에서 미달 비율이
두드러지게 높아지고 있다는 점이 심각한 신호로 해석된다.
기초학력 미달이란 단순히 ‘공부를 못하는 학생’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이는 해당 학년에서
최소한 이수해야 할 학습 능력을 갖추지 못한 상태를 말하며,
문장 해석, 기본 연산, 단순 독해조차 어려운 수준을 포함한다.
교육의 최전선에 있는 교사들은 말한다.
“단지 공부를 못하는 게 아닙니다.
수업을 이해할 수조차 없는 아이들이 늘고 있어요.”
이는 교실 붕괴의 조짐이자,
국가 교육 시스템 전체가 무너지는 사각지대의 경고음이다.
이 글에서는
기초학력 미달 학생이 왜 늘고 있는지,
무엇이 그 원인이고,
어떤 해결책이 가능한지 차분히 정리해보려 한다.
기초학력 미달, 단순한 ‘낮은 성적’의 문제가 아니다
기초학력이란 학교 교육의 기본 틀 안에서 반드시 갖춰야 하는
핵심 학습 역량을 의미한다.
이는 단순히 좋은 성적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국어의 경우 글을 읽고 요지를 파악하는 능력,
수학은 사칙연산과 기본 개념의 이해,
영어는 간단한 문장을 해석하고 표현할 수 있는 최소한의 수준을 말한다.
그러나 최근 교육 현장에서는
이 기초학력을 갖추지 못한 학생들이 늘고 있다.
2023년 국가 학업성취도 평가에 따르면,
중3 학생의 10명 중 1~2명은
국영수 중 최소 한 과목 이상 기초학력 미달로 나타났으며,
특히 수학의 경우 13% 이상이 기초학력에 도달하지 못한 상태였다.
이는 코로나19 이후 원격 수업이 길어지며 나타난
대표적 교육 손실의 결과로 해석된다.
단순히 수업을 ‘듣지 못한 것’이 아니라,
이해의 토대가 완전히 무너진 상태에서
다음 학년으로 넘어간 누적 결손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또한 가정 내 학습 환경 격차도 무시할 수 없다.
맞벌이, 다자녀, 조손가정, 외국 출신 보호자가 있는 경우 등에서는
학교 수업 외 보완이 어려워
학습 공백이 더 길고 깊어질 수밖에 없는 구조다.
결국 기초학력 미달은
단순히 ‘노력이 부족한 학생’의 문제가 아니다.
이는 교육 시스템이
아이들의 다양한 출발점과 배경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구조적 문제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기초학력 미달 학생들의 학습결손은
단순히 ‘이해가 느린 아이’라는 수준을 넘어서,
교육과정 자체를 소화하지 못한 채 학교를 다니고 있는 구조적 문제다.
국어 수업에서 글을 읽고 핵심 내용을 뽑아내지 못하거나,
수학에서 분수와 소수의 차이를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반복적으로 발견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무리 진도를 나가도
학생은 수업을 ‘듣는 듯하지만 참여하지 않는 상태’로 남게 된다.
무엇보다 심각한 건,
이 상태가 반복될수록 아이 스스로 학습을 포기하는 태도를
갖게 된다는 점이다.
“나는 원래 공부를 못 해”, “어차피 난 틀릴 거야” 같은 자기 인식은
자존감을 깎아먹고, 도전 자체를 단념하게 만든다.
이는 심리적·정서적 위축을 불러오며,
나중에는 학교생활 전반에서 부적응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결국 기초학력 미달은 ‘공부 좀 못하는 문제’가 아니라,
학생의 배움 권리가 단절되는 위기이자,
교육 시스템이 ‘누구도 뒤처지지 않게 한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결과라 볼 수 있다.
그만큼 이 문제는 조기에 발견하고
다층적으로 대응해야 할 교육의 최우선 과제다.
교실 속 학습 격차, 방치될수록 위험해진다
기초학력 미달 학생들은
단순히 수업을 따라가지 못하는 수준이 아니다.
문제를 읽지 못해 시작조차 하지 못하고,
질문의 의미조차 이해하지 못해
시험을 보지 않는 것과 같은 결과가 나타나기도 한다.
교실 안에서 이러한 학생들은 종종 ‘주의력 부족’,
‘수업 태도 불량’ 등으로 오해받기도 한다.
그러나 실상은 무엇을 모르는지도 모르기 때문에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며,
이로 인해 더욱 조용히, 서서히 교실의 가장자리에 머물게 된다.
문제는 이 상태가 방치되면
학습 격차는 시간의 흐름과 함께 눈덩이처럼 커진다는 점이다.
초등학교 3~4학년부터 발생한 미달 상태가
중학교, 고등학교로 이어지면서
결국 학교 부적응, 자퇴, 사회 소외로까지 이어지는 경우도 적지 않다.
교사 입장에서도 현실적인 제약이 크다.
한 반에 25~30명의 학생이 있고, 시간은 정해져 있으며,
진도도 따라가야 하는 상황에서
기초학력 미달 학생을 따로 챙기기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더군다나 학교 내에서 보충 수업을 운영할 인력이나
시간, 공간조차 부족한 경우가 많다.
이로 인해 결국 학부모가
사교육을 통해 보완할 수 있는 가정은 따라잡지만,
그렇지 못한 가정의 아이들은
학습 결손이 구조적으로 고착되는 길에 놓이게 된다.
즉, 기초학력 문제는 단순한 학습 능력 격차를 넘어
사회적 불평등의 시작점이자
재생산의 구조적 통로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훨씬 더 심각하다.
기초학력 미달은 시간이 지날수록
회복이 더 어려워지는 특성을 갖고 있다.
초등학교 저학년 시기에 기본 개념과 학습 습관이 형성되지 않으면,
이후 중등 과정부터는 진도 자체가 따라가기 힘들어지고,
결국 고등학교에 가서는
‘이해하지 못한 채 수업만 듣는’ 상태에 머물게 된다.
이는 학생의 학업 포기 가능성, 자퇴율 증가,
사회 소외로까지 이어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특히 학습결손 상태의 학생일수록
학교 안에서 ‘눈에 띄지 않는 존재’가 되기 쉽다.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고,
질문하지도 않고, 시험도 그냥 비워두는 식이다.
교사는 교사대로 진도와 행정업무에 쫓기고,
학생은 점점 더 자신을 ‘포기된 존재’로 인식한다.
이러한 상황은 결국
교실 전체의 역동성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수업이 진행될수록 이해하는 학생과
이해하지 못하는 학생의 간극이 벌어지고,
교사는 ‘누구를 기준으로 수업을 설계해야 할지’
고민에 빠지게 된다.
이는 교실 내 학습 집중력 저하, 수업 포기 학생 증가,
교사 번아웃으로까지 연결될 수 있다.
교육이 할 일은 ‘천재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기초를 지키는 것’
최근 정부와 시도교육청은
기초학력 보장을 위해 다양한 정책을 시도 중이다.
대표적으로는 ‘기초학력보장법’ 제정, ‘두드림학교’ 운영,
그리고 기초학력 진단-보정 시스템, 튜터링 프로그램,
AI 기반 맞춤형 콘텐츠 제공 등이 있다.
또한 2024년부터는 학습지원 강사가 초등학교에 배치되어
기초학력 미달이 우려되는 학생들을 개별 지도하고 있으며,
중학교에서도 기초학습실, 개별학습상담 프로그램이 확대되고 있다.
그러나 아직은 ‘전국적 수준의 안정적 운영’과는 거리가 있다.
예산, 인력, 공간 문제뿐 아니라
기초학력 미달 학생에 대한 ‘낙인 효과’도
여전히 극복 과제로 남아 있다.
실제로 일부 학생은 “나는 떨어진 애”라는 인식을 갖고
프로그램 참여 자체를 꺼리거나,
자존감 하락을 경험하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단순한 보충 수업 제공이 아니라,
학교 교육 전체가
기초학력 중심으로 재설계되는 노력이 필요하다.
(예: 정규 수업 시간 중 기초 개념 반복 학습 시간 확보,
수준별 피드백 수업 운영, 온라인·오프라인 병행 수업 등)
기초학력 회복을 위한 정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단지 보충 수업을 몇 시간 늘리는 수준이 아니라,
학교 전반의 수업 방식과 교육 철학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
즉, 수업이 지식을 전달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학생 개개인의 이해 정도를 실시간으로 진단하고,
그에 맞는 피드백과 지원이 가능한 구조여야 한다.
예를 들어, 서울시교육청은
최근 AI 기반 학습 보조 시스템을 도입해
학생별 이해 수준에 따라
즉각적인 피드백과 문제 추천 기능을 제공하고 있으며,
경기도교육청은 교과별 기초학력 전담 인력을 확대해
정규 수업 내에서 개별화 학습 지원이 가능하도록
구조를 설계하고 있다.
또한 교사 연수 체계도 함께 변화해야 한다.
교사들이 수업 외 시간에
기초학력 지도까지 감당해야 하는 이중 부담에서 벗어나,
전문 인력과 협력할 수 있는 시스템이 마련되어야 한다.
학교 내부에서 기초학력 문제를 ‘추가 업무’가 아닌
‘공동 책임’으로 인식하게 만드는 문화가 필요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기초학력 회복은
그 자체가 ‘아이의 존엄성을 지켜주는 일’이라는 관점 전환이다.
학력은 시험 점수가 아니라, 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의사소통 능력과 자기표현의 수단이다.
이 기본을 놓치지 않도록 돕는 것이,
교육이 사회에 주는 가장 본질적인 역할이다.
기초학력은 모든 교육의 시작이자 존엄이다
기초학력 미달은 단순한 ‘성적 하위 학생’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교육의 구조가 아이들을 놓치고 있다는 경고이며,
‘배움의 기회조차 갖지 못한 아이’를 방치한
사회적 책임에 대한 물음이다.
교육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아이의 가능성을 발견해주는 일이다.
그 시작은 ‘기초’를 지켜주는 일이다.
글을 읽을 수 있고, 문제를 이해할 수 있고,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도록
가장 기본적인 ‘배움의 권리’를 보장하는 것.
지금 우리가 살펴봐야 할 성적표는
전교 1등의 점수가 아니라,
아직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채 교실에 앉아 있는 그 아이의
빈 페이지일지도 모른다.